답답해
변이 시원치 않다고 몇 주째 불평하셨지만 일부러 모른척 했었다.
급기야 배변하신 사실을 내게 알려서 괴로워졌다고 어머니를 들볶기 시작하셨다.
견디지 못하신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갔다. 관장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동안의 불만을 일부러 행동을 느리게 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옷을 벗으시라고 말씀드려도 묵묵히 서계시기만 하다가 천천히 벗으셨고
미리 소변 보고 오시라고 해도 화장실 문앞에 한참을 서서 시간을 끄셨다.
관장액 넣는 시늉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신 뒤 정리하면서 한숨을 쉬자
어머니께서 가만히 웃으시면서 속삭이셨다.
"늘 그렇게 느릿느릿 사람 진을 뺀단다. 매일 보는 나는 얼마나 답답하겠니?"
Posted by 보리..
트랙백 주소 :: http://undutifulness.tistory.com/trackback/10
봄이 돌아왔습니다
달력의 숫자가 늘어나자 움츠렸던 세포들이 기지개를 켭니다.
거울 속 비죽비죽 뻗친 머리카락이 당신께도 거슬리시나봅니다.
목욕 갈 때마다 이발 하시겠느냐고 여쭤도 고개를 저으시더니
이번 주에는 먼저 전화해서 한 시간 일찍 오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온 젊은 부인이 퍼머 하시는 동안 기다리셔야 했는데
눈도 집중력도 떨어진 아버지께는 잡지가 무용지물입니다.
무심한 듯 밖을 내다보시는 아버지와 창가의 봉제 곰인형을
갸우뚱 들여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어색하게 어긋납니다.
미용사는 부서질 듯한 노인이 오래 앉아 기다린 게 미안한 듯
서둘러 퍼머를 마치고 아버지를 이끌고 의자로 모셔갑니다.
친정 아버지 대하듯 응대해주는 그 분 마음이 천사 같습니다.
잘려나가는 겨울에 아버지의 추위도 붙어 가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보리..
트랙백 주소 :: http://undutifulness.tistory.com/trackback/9
당직하던 날
저녁을 먹고 일터로 되돌아가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낯익은 듯 낯선 목소리.
"인호야, 나 J야. 잘 있었니?"
깜짝 놀랐다. 외할머니 장례식 때 25년 만에 만났던 친구였다.
의례적 인사가 오간 뒤 나온 말이 무겁다.
"어머니가 체중이 줄고 변비가 심해서 걱정이다. 어떤 검사를 받게 해드려야 할지……."
대장내시경을 받아보셔야 할 것 같다고 권했다. 2주 후 저녁에 다시 전화가 왔다.
"인호야, 네 말대로 어머니 대장내시경 받으셨는데, 대장암이 걸리셨단다.
CT랑 다른 검사도 받았는데 4기라네. 간하고 폐에도 전이가 됐다고 그러더군.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몸무게가 줄기 시작한지 한참 되셨다는데 말씀을 안 하셔서 몰랐어.
변비 때문에 동네 병원이랑 약국에도 많이 다니셨다고 하시네.
아들이 돼 가지고 어머니 얼굴 홀쭉해지시는 것도 무심히 넘겼다니 한심해.
내가 사업 한답시고 어머니 신경을 못 써드려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고……."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치료 잘 받으시게 하라고 말했다.
언제나 늦기만 하는, 조금만 아파도 들쳐업고 달려가셨던 은공에 대한 우리의 응답.
한 줌도 안 되는 연민과 죄책감으로 도저히 덮을 수 없는 회한.
Posted by 보리..
트랙백 주소 :: http://undutifulness.tistory.com/trackback/8